덕수궁

2008. 9. 26. 01:03일상다반사/삽질하기(출사)

<사진촬영 - 이태훈>



주일을 맞아 초가을의 푸른하늘이 고궁으로 나를 이끌었다.
서울의 시청앞 덕수궁은 9살때 누나들과 함께 들어가 보고는 26년만에 입장료를 내고 들어가게 되었다.
예전부터 사람들은 덕수궁 돌담길을 연인이 걸으면 헤어진다는 얘기가 있었다.
지금은 헤어질 연인조차 없는 난 아무런 부담없이 돌담길을 누비고 다닐 수 있었다.
대한문을 지나 미술관으로 향하는 길을 지나 관리사무소로 쓰이는 건물을 보고 나면 미술관 안에 들어가 전시작품들을 보고나면 더이상 볼 것이 없다.
많은 부분이 보수공사에 들어가 있기 때문이다.
입장료 10,000을 내고 들어오기에는 다소 볼거리가 부족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덕수궁이 갖는 역사적 의미를 되새기며 이곳저곳을 카메라에 담았다.


덕수궁의 창건

1592년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의주로 피난 갔던 선조가 1년 반만에 한양으로 돌아왔으나, 한양의 모든 궁궐은 왜군에 의해 불타 없어져 머물 궁궐이 필요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당시 황화방(皇華坊)에 위치한 월산대군(月山大君) 후손의 집과 인근의 민가 여러 채를 합하여 임시 행궁(行宮)으로 삼고 '시어소(時御所)'로 머물게 되었으니, 이것이 훗날 덕수궁(경운궁)의 시작이었다.
선조는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궁궐을 재건하려 했으나, 당시의 궁핍한 국가재정 상황 등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결국 1608년 2월 정릉동 행궁 정전(석어당 추정)에서 승하하고 만다.

선조의 뒤를 이어 이 곳에서 즉위한 광해군은 1611년 창덕궁을 재건하여, 그해 10월 창덕궁으로 이어(移御)하면서 '경운궁(慶運宮)'이란 이름을 비로소 짓게된다.
병조판서 이항복을 시켜 경운궁의 담장을 두르고 궁궐로써의 면모를 가다듬는 것도 이 무렵의 일이다.
하지만 광해군은 곧 다시 경운궁으로 돌아와 머물다 1615년 창덕궁으로 아주 이어(移御)를 한다.

한편 1623년 인조반정의 성공으로 광해군을 폐위시킨 인조는 광해군에 의해 경운궁에 유폐되어 있던 인목대비로부터 왕으로 인정을 받고, 경운궁 별당(즉조당 추정)에서 즉위한 뒤 인목대비를 모시고 창덕궁으로 이어하게 된다.
이때 인조는 선조가 머물던 즉조당과 석어당 두 곳만 남기고, 나머지 경운궁의 가옥과 대지를 원래 주인에게 돌려주고 경운궁을 아주 떠나게 된다.
이로써 경운궁은 왕이 공식적으로 머물며 국정업무를 보던 궁궐로써 기능을 마감하였다.

이후 영조때(영조 49) '선조가 경운궁(덕수궁)에 거처를 정한 3주갑(180년)과 선조의 기일(승하일)을 맞이해, 영조가 세손(정조)과 함께 경운궁 즉조당에서 추모 사배례(四拜禮)를 올리는' 등 기념의식을 갖기도 하였고, 고종 30년(1893)에 '선조가 경운궁에 거처를 정한 5주갑(300년)을 맞아 고종이 세자(순종)와 함께 경운궁 즉조당에서 추모 사배례(四拜禮)를 올리기도 하였다. 그리고 난 후 1897년 고종이 다시 이곳으로 환어(還御)하기 전까지 비어있게 된다.



덕수궁 현황

지정현황 : 사적제124호 덕수궁일원(1962.7.25지정, 2007.2.7 추가지정)
대지면적 : 63,069.2㎡(18,514.6평) 
고건물 : 중화전, 석조전 등 22동 
- 국보 : 1건(보루각, 자격루)
- 보물 : 3건(중화문 및 중화전, 함녕전, 흥천사종)
편의시설 : 화장실 3동, 매점 1동
수목 : 111종 10,296 그루


대한문 내부천장 단청


덕수궁 돌담길


대한문 앞길 큰북


중화문


중화전 1


중화전 2


중화전 정면


중화전 앞 비석                                                       중화전 앞 해태상


중화전 앞 향로                                                       중화전 내부


중화전 문살                                                           중화전 문고리


미술관


미술관과 석조전을 연결하는 브릿지


미술관 출입계단


미술관 이오니아식 기둥 주두                                    석조전 측면


미술관 내부 - 천장이 있는 로비


미술관 내부 - 2층 복도


석조전


석조전 전면 중앙부


석조전 전면


석조전 전면 중앙부                                                 준명당 중앙부



준명당(위의 사진)

규모 : 231.43㎡
연혁 : 이 건물의 창건 연대는 미상이나 고종(高宗)때에 중건된 것으로 추측되는 목조건물로 즉조당과는 복도로 연결되어 있다. 고종이 신하나 외국 사신을 접견하던 곳으로, 함녕전이 지어지기 전까지 고종의 침전으로 쓰였다. 정면 6칸, 측면 5칸의 겹처마 팔작지붕집이며 높은 기단위에 세워졌다. 좌우 툇간에 쪽마루를 두고 있다. 1916년 4월에는 덕혜옹주 교육을 위해 이곳에 유치원을 개설하기도 하였다.


신기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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